죽음10(죽음이 주는 교훈)
면 인생의 반쪽 밖에 모르는 것이 된다. 많은 스승들이 “삶을 알고자 하면 죽음에 대해 배우라”고 가르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들은 죽음을 금기시하는 풍조 때문에 언제나 외면당해 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죽음을 알게 됨으로써 많은 것을 배운다. 죽음에 대해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진정한 삶은 죽음을 통해 얻어진다는 것과 잘 죽기위해 산다는 것을 안다. 잘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삶에서 한 치의 잘못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잘살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하고,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삶은 죽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죽음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른 삶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죽음은 삶을 보완하고 가르치는 스승이다. 따라서 죽음을 모르면 삶을 모르고,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삶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금기시 할 무엇이 아니라 직시하고 만나야 할 그 무엇이다.
우리의 인생이 한 번 뿐이라는 사람도 있고, 여러 생을 산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과 현자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여러 생을 거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우리의 삶이 학습이고 체험이라면, 한 번의 삶으로는 다양한 체험을 하는데 역부족이라는 생각이다. 죽음이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 될 수 있는 것은, 여러 생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번 삶에서 좋은 삶을 살았다면, 다음 생에서도 좋은 삶을 살아갈 확률이 높다. 반면에 이번 삶에서 나쁜 삶을 살았다면, 다음 생에서도 나쁜 삶을 살아갈 확률이 높은 것이다.
죽음이 주는 교훈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우리가 죽음을 통해 교훈을 얻으려면, 먼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통하여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삶에 대한 허무함’일 것이다. 어제 까지만 해도 건강했던 사람이 한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허무한 것이 인생임을 보고 느끼면서도,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히려 죽음을 생각하는 것조차 불길하게 여긴다. 이것은 죽음의 허무함보다 더 허무한 것이다. 이토록 허무한 것이 인생이라면, 왜 허무하지 않은 영원한 진리를 찾지 않는 것일까? 그저 수명이 다하여, 또는 운명에 의해서 그렇게 죽는다고만 생각하고 말일인가. 죽음이란 지금 이곳에 항상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죽음을 그저 남의 일이나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이래서는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 곁에서 사람들이 죽어 간다는 것은 “다음번엔 바로 네 차례다”라는 신의 엄중한 경고이다. 그리고 “남은 시간이 촉박하니 지금 즉시 허무하지 않은 진리를 찾아 나서라”는 신의 독촉장인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진리나 깨달음은 어느 특정한 사람의 일이지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리에 대한 탐구는, 사람마다 누구나 해야 하는 의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는 것이 허무한 게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일말의 깨달음도 없이 죽게 되는 그것이 진정 허무한 것이다. 이런 죽음은 그가 이 세상에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헛된 삶을 살았다는 뜻이고, 헛된 삶이 좋은 삶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일별(一瞥)이 있었다면, 그는 이 세상에 와서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어도 좋은 것이다. 또 우리는 죽음을 통하여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배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뜻이다. 이것만 알고 실천할 수 있다면, 그의 인생은 나무랄 데 없는 삶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알몸으로 태어났고, 죽음에 이르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재산· 권력· 학력· 명성· 성공 등, 이 세상에서 쌓은 부귀공명(富貴功名)이 죽음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고, 왕이나 거지도 똑같이 빈손으로 떠난다. 인간이 태어날 때는 모든 것을 움켜잡을 듯 주먹을 불끈 쥐고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지르지만, 죽을 때는 빈주먹조차 쥘 힘이 없어 손을 펴고 가는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욕심을 버리지 못해 움켜쥐려고만 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가진 것에 그토록 집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맞이해야할 손님’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남을 해칠 수 있겠는가? 또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 모두는 죽음이라는 뱀이 우리 몸의 절반 이상을 이미 삼켰으며 점점 더 먹히고 있는 상태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뱀의 아가리 속에서 반만 남은 몸뚱이로 ‘네것’ ‘내것’, ‘그르고’ ‘옳고’를 반복하면서, 뱀이 온 몸을 삼킬 때까지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고 있으니, 우습지 않은가!
우리 모두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존재들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이미 죽음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다. 여기에 어떠한 차별이 있을 것이며, 누구를 미워하고 무엇을 다툴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관용과 사랑, 그리고 감사만 남아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바람 앞에 등불처럼 서 있는 사람들에게서 관용과 사랑은 찾아 볼 수 없고, 온갖 이기와 탐욕에만 몰두해 있는 모습들을 보면 참으로 가관(可觀)이다. 성인들이 이런 모습들을 바라본다면, 인간의 무지함에 오직 연민(憐憫)만이 가득할 것이다.
죽음은 슬픈 것인가
우리가 어떤 사람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까닭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그의 삶에 대한 측은함, 지난날의 추억,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슬픔 때문일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슬픈 것은 아무래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될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오는 슬픔이다. 그러나 저승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슬픔은 좀 덜할 것이다. 다음으로 죽음 자체에 대한 슬픔인데, 이것은 죽음으로 인하여 한 사람이 완전히 없어진다는 허무함에서 오는 슬픔이다. 그러나 죽음은 하나의 이주(移住)이며 변화와 순환일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크게 슬프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슬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세상에 오고 싶어 온 사람도 없고, 가고 싶어 떠나는 사람도 없다. 또 초청받고 온 사람도, 허락받고 떠나는 사람도 없다. 그렇지만 마치 더러워진 옷을 바꾸어 입듯, 모양만 바꾸어 끝없이 오고가는 것이 인생이다. 죽음은 이런 인생의 한 과정일 뿐이니, 죽음을 두고 슬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또 어떤 사람의 죽음을 두고 우리가 슬퍼하거나 또는 기뻐한다 해도,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기쁨과 슬픔 모두는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사람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죽음은 슬퍼한다. 그러나 인간이 태어나서 한 세상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생각해 본다면, 태어난다는 것이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닌 것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임사체험자들의 말에 의하면, “죽은 다음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죽음을 오히려 기뻐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죽음에서의 기쁨과 슬픔은, 아무래도 그 사람의 삶의 질에 따라 다를 것이다. 참된 삶을 살아서 죽어도 아무런 회한이 없는 사람들은, 대체로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와 하나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죽음을 통하여 배우고, 완전한 자유를 성취하려는 희망을 가진다. 죽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들의 앞날은 밝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다. 반대로 좋지 못한 삶을 살아서 죽음에 회한이 많은 사람들은, 진리와는 상관없이 물질에만 매달려 일생을 허비한 사람들이다. 삶에서는 아무런 소득이 없고, 죽음에서도 아무런 희망이 없다. 죽어서도 문제가 많을 것이며,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들의 앞날은 어두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 슬퍼해야할 죽음은 이런 사람들의 죽음이다. 이 때문에 죽음은 슬픈 것이 되고 ‘죽음은 슬픈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생기면서 죽음을 슬퍼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런 사람들에게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 자체가 부질없는 말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는 “슬퍼하되 다만 지나치지 말라”고 권고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슬픈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가운데, 기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죽음은 극히 드물고 이를 판단할 만한 의식을 가진 사람도 드물다. 죽음이 슬픈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 속에서는, 설혹 기뻐해야할 죽음이 있다 해도 이를 드러내어 기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도 죽음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락한 현실에 대한 미련 때문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어리석고 가진 것이 많을수록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죽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슬픔도 부질없는 일인데, 하물며 멀쩡하게 살아있으면서 죽음을 슬퍼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以上 死終"